티스토리 뷰
1300여 년 동안 사라졌던 신라시대 사서 화랑세기가 필사본으로 세상에 나타나면서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김대문이 700년경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화랑의 역사와 조직, 그리고 놀라운 사생활까지 담고 있어 진본이라면 신라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중요한 자료입니다. 하지만 10년 넘게 진위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발견과 진위 여부 논쟁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 부산의 한 가정집에서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소장자 김경자 씨의 남편이 남긴 유품으로, 필사본을 만든 사람은 충북 청원 출신의 박창화입니다. 박창화는 1889년 태어나 1962년 사망한 한학자로, 1903년경 이 책을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 번째 필사본은 16장 분량으로 첫 번째 대표 화랑 위화랑부터 15번째 김유신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었습니다.
1995년에는 박창화의 손자 박인규 씨가 소장한 두 번째 필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필사본은 162장 분량으로 네 번째 대표화랑부터 32번째까지 총 28명의 기록을 담고 있어 첫 번째 것보다 훨씬 방대하고 상세합니다. 두 필사본을 합치면 완전한 화랑세기가 되는 구조입니다. 부산의 한문학자 이태일 선생이 가장 먼저 이 필사본을 검토했으며, 곧바로 신문에 번역하여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러나 발견 직후부터 이 필사본이 진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베낀 것인지, 아니면 김대문이 쓴 것처럼 꾸민 위작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필사본의 마지막 부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화랑의 세보를 저술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래서 불초자식이 공무 여가에 화랑 집단의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라고 명확히 김대문 저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진본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필사자가 일부러 이런 내용을 만들어 넣었다는 위작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더욱 의심을 사는 것은 필사본의 물리적 형태입니다. 책의 매듭이 우리나라 전통 방식인 다섯 개가 아니라 일본식인 네 개이며, 종이 역시 한지가 아닌 1930년대 일본 정부에서 사용된 빨간색 금이 그어진 인쇄용지라는 점입니다.
김대문 저작설과 화랑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
필사본이 진본이라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신라 화랑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도 18세 풍월주, 즉 18번째 대표 화랑이었다는 기록입니다. 지금까지 김춘추는 화랑 출신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는 완전히 새로운 정보입니다. 김유신은 15세 풍월주였으며, 두 사람은 단순히 친구가 아니라 화랑이라는 같은 조직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화랑의 기원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화랑이 신궁을 받드는 제사 집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성 수령에서 시작했다가 나중에 남성 수령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화랑의 기능과 성격이 종교적 제사 집단에서 군사적 전사단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줍니다.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 단석산에서 도인을 만나 무예를 익혔다는 기록도, 단순히 무술 수련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며 기도하고 신을 만나는 신비스러운 체험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필사본의 서문에는 화랑이라는 명칭이 첫 번째 대표 화랑인 위화랑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명확히 쓰여 있습니다. 화랑의 조직과 구성 체계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삼국통일에서 화랑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체계적인 조직력 덕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춘추의 결혼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김유신은 동생 문희와 김춘추를 결혼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웠지만, 김춘추는 한동안 결혼을 망설였습니다. 필사본에 따르면 당시 김춘추에게는 보랑이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고 고타소라는 딸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존 역사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던 내용입니다.
신라 화랑 역사 재해석과 향가·마복자 논쟁의 핵심
필사본의 진위 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향가와 마복자 풍속에 관한 기록입니다. 필사본에는 562년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때 전쟁에 나가는 사다함을 위해 그의 애인 미실이 지은 송출 가라는 향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향가가 13세기에 쓰인 삼국유사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이후 더 이상 지어지지도 해독되지도 못했다가 1929년에야 다시 해독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필사본이 삼국유사를 참조하여 1929년 이후에 창작된 위작이라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국어학 전문가들은 다른 견해를 제시합니다. 송출가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바람이 불다 하되 네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네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임이여 잡은 손을 놓아 물리려"라는 구조와 표현이 틀림없는 신라의 향가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제 말기인 1930~40년대는 향가 연구가 겨우 작품을 읽어내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시 수준으로 이런 향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분석입니다. 오히려 이미 향찰로 표기된 것을 후대에 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입니다.
마복자 풍속도 큰 논란거리입니다. 마복자는 화랑이 부하의 임신한 아내와 관계를 맺는 것을 제도화한 것으로,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마복자라고 부릅니다. 필사본에는 낭도의 아내가 임신하면 우두머리 화랑에게 총회를 얻으며 남편이 재물을 바치고, 아들을 낳으면 다시 재물을 바친다는 구체적인 절차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풍속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사회 질서의 기본 단위인 가족이 유지될 수 없다며 위작의 증거로 봅니다. 조정 대신들의 처까지 마복자 풍속에 노출된다면 사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반면 다른 해석도 존재합니다. 마복자는 단순한 성적 문란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조항의 경우 마복칠성이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법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마복자를 거느린 사람과 마복자의 관계는 후견자와 피후견자의 관계로, 정치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는 장치였다는 분석입니다. 미실의 경우 남편 외에 여섯 명의 정부가 있었다는 기록도 유교적 관점에서는 문란해 보이지만, 유목 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종족의 단절을 방지하기 위한 생활 풍습이었을 수 있습니다. 신라 시대 토우를 보면 그들의 성에 대한 의식이 매우 자유로웠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진본이든 위작이든 신라사를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향가의 진정성, 마복자 풍속의 실재 여부, 일본식 장정과 종이의 의미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냉정한 검증이며, 흥미로운 이야기일수록 더 엄밀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필사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jN_Wo7PGR3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