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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강변에 자리한 풍납토성은 오랜 세월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9년부터 본격화된 발굴 작업을 통해 이곳이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기와건물지, 제사유적, 목조우물, 그리고 국제교류의 흔적까지, 풍납토성은 단순한 성터가 아니라 백제 500년 역사를 품고 있는 살아있는 유적지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기와건물지와 공방지구의 발견
풍납토성 중심부 서북쪽 미래마을 연립 구역에서는 백제 초기 건축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형 기와건물지가 발굴되었습니다. 지하 1m에서 4m까지의 지층에서 나온 유물들은 거의 완형에 가까웠으며, 견부가 발달하고 평저미가 있는 백제 호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목탄이 쏟아져 나온 지점에서는 건물 기둥이 불에 타 그 자리에 주저앉은 흔적이 확인되었고, 이는 AD 4세기경 백제 초기 집터로 판명되었습니다.
발굴팀의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막대한 분량의 기와무지였습니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한쪽에서 전부 폐물이 되어 쓸려 내려온 상태로 발견된 기와들은 총 500상자 분량에 달했습니다. 이렇게 완전하게 대형 기와건물을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한 곳에서 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된 것은 풍납토성 발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기와들은 서로 다양한 색상과 모양을 보여주었으며, 그중에서도 기아악정 문양을 한 막새들은 풍납토성에서만 출토되는 독특한 유물이었습니다.
기와무지에서 함께 출토된 전(塼)은 도로 포장이나 건물의 하부 구조에 쓰이는 것으로, 일반 주거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급 건축 자재입니다. 이와 함께 발굴된 초석은 약간 특이한 형태로, 바깥쪽은 네모지고 안쪽은 둥글게 파여 기둥을 끼워 넣을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대형 건물지에 기둥을 세우기 위해 사용했던 이 초석 위로 기둥을 올리고 막대한 양의 기와를 사용해 지붕을 올린 건물은 막새로 장식까지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기와건물의 처마 밑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운 강자갈이 처음 발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처리하고 조경 효과를 내는 일종의 산수석으로, 당시 백제인들의 건축 미학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2024년 5월 중순에는 이 기와건물의 용도를 밝혀줄 결정적 단서인 불가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쇠물의 흔적과 철 재련에 사용된 풀로 흔적, 그리고 재련 작업 중 나오는 철거인 슬래그가 널려 있어 이곳이 왕실에 공급할 물품을 제작하던 공방 지구였음이 드러났습니다.
고대성 체계를 연구해 온 이형국 교수는 미래마을터가 왕궁 왕성의 선한 지역, 즉 한강변 쪽에 위치한 왕실 공급용 공방 지구였을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기와, 초석, 전돌 같은 고급 건축 자재와 유물들은 이 건물의 위상이 상당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이 기와건물은 공방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추정되며, 풍납토성이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생산과 행정 기능을 갖춘 왕성이었음을 입증하는 핵심 증거가 되었습니다.
제사유적과 왕국의 구심점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발굴된 제사 관련 유적은 이곳이 백제 왕성이었음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1999년 경당지구 발굴 당시 역사학계를 초긴장시킨 유물은 바로 말뼈였습니다. 한 구덩이에서 출토된 말뼈는 무려 아홉 개체에 달했으며, 모든 말뼈가 다른 부위는 없고 머리뼈만 남아 있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권오영 교수는 이를 의도적인 폐기로 추정하며, 말머리만 골라서 한 곳에 묻은 것은 특별한 제의 행위였을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말은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귀중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말머리만 골라서 한 곳에 묻어둔 것일까요? 그 답은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일본 오사카의 시조나와테시 박물관에 소장된 백제 유물 중에도 말머리뼈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유물들은 대체로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즉 한성백제 멸망 직후인 475년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위례성이 함락된 후 시조나와테시로 건너온 백제인들이 특별한 제를 올릴 때 바친 제사용 희생물로 추정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사례를 통해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도 백제인들이 말머리뼈를 희생물로 바친 기우제와 같은 제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말머리뼈가 출토된 구덩이 바로 옆에서는 여(呂)자 형태와 비슷한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습니다. 일반 건물지에서는 볼 수 없는 폭 1.5m의 도랑이 여자형 건물지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그 안은 물로 채워져 이곳을 신성시하고 보호했던 당시의 상황을 말해줍니다.
건물 주변으로 도랑을 파고 전돌을 깔은 후 물을 채운 이 건물은 특별한 권위와 위엄을 갖추도록 설계된 백제의 제사터였습니다. 건물의 방위가 정남북 방향으로 배치된 점 역시 계획적으로 제사 행위가 이루어지던 공간임을 뒷받침합니다. 3세기부터 5세기까지 계속해서 제사가 이루어지던 이 공간은 백제 왕국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경당지구에서는 대부(大夫)자가 새겨진 토기와 정(井) 자가 새겨진 토기도 발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관직명으로 추정했으나, 고구려 아차산 유적에서도 같은 형태의 대부정(大夫井) 문자가 새겨진 토기가 나온 것으로 보아 이는 관직명이 아니라 종교적 기호로 해석됩니다. 정(井) 자는 샵(#) 같은 기호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그리고 일본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가진 부호입니다. 사악한 기운을 멀리하고 나쁜 기운이 오지 못하게 막는 이 기호는 제사 의식과 관련된 종교적 기능을 보여줍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제사 관련 기록이 자세히 나옵니다. 구수왕 14년에는 가뭄이 들어 동명사당의 제사를 지냈더니 곧 비가 내렸다고 전하며, 비류왕 10년에는 왕이 몸소 희생물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명성왕 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국모에 대한 제사, 천지에 대한 제사 등 다양한 제사가 행해졌는데, 이러한 제사는 왕국이 형성되고 왕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치러지는 국가적 의례였습니다. 경당 유적의 경우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고 기우제를 올렸던 백제 제사의 중심 공간이었으며, 풍납토성이 왕성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목조우물과 국제교류의 흔적
풍납토성 동벽 바깥쪽 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는 2023년 10월 예상치 못한 백제 목조우물이 발굴되었습니다. 지하 4m 깊이에서 발견된 이 우물은 나무로 정교하게 엮어 만든 목조우물로, 순수하게 나무로만 제작된 목조물이 발굴된 것은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물이 성 바깥쪽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성 안쪽뿐만 아니라 성 바깥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알려주며, 한성백제기에 이렇게 제대로 된 우물이 출토됨으로써 당시 목재 우물 제작 방법과 두레박 사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우물 목재에 대한 보존 처리 과정에서 백제인들이 나무로 우물을 만든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풍납토성 일대 지반은 뻘층이었고, 나무는 뻘층은 잘 지탱하는 소재였습니다. 석조로 만들 경우 지반이 좋아 앉으면서 벽이 무너져 내릴 우려가 있었지만, 목재로 만들면 지질 구조에 잘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자현미경으로 수종을 분석한 결과 상수리나무로 확인되었는데, 상수리나무는 참나무로 불리며 조직이 치밀해 단단하고 물속이나 다른 환경에서도 잘 견디는 특성이 있습니다. 유럽의 오크통과 같은 재료로, 집을 짓거나 배를 만들 때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목재의 양쪽 끝은 암수로 다듬어져 정교하게 결합되었으며, 우물정자 형태로 한 단 한 단 짜올린 목조우물의 높이는 무려 14단, 2.5m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결구 수법은 백제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이나 왕궁리 석탑의 결구 수법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며,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천된 양식의 구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우물 목재에 건축에 사용한 나무를 재활용한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장부 홈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있어, 주변에 참나무로 만든 고상 주거나 귀틀집 같은 건물이 있었고 그것을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조우물 안에서는 당시 백제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나뭇가지 부분을 살려서 절단하고 끈으로 묶었던 고리 홈이 파여진 두레박 건지용 목제품, 반원형의 나무 두레박, 물동이를 이을 때 사용한 똬리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물풀로 엮은 똬리는 직경이 10cm 정도로 지금도 우리가 물건을 묶을 때 사용하는 똬리와 모습이 비슷합니다. 우물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물동이용으로 보이는 항아리였으며, 이를 통해 풍납토성 동벽 밖에 거주한 백제인들의 삶의 모습이 처음으로 발견되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