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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위치한 5층 석탑은 단순한 통일신라 유적이 아니라 백제와 통일신라를 잇는 역사의 교차점입니다. 4만여 평 규모로 확대된 발굴 작업은 절터로만 여겨졌던 이곳에서 백제 왕궁 시설과 금제 금강경이라는 세계 유일의 보물을 드러냈습니다. 40년 만에 재조명된 이 유적은 백제 무왕의 숨겨진 이야기와 익산의 역사적 위상을 새롭게 쓰고 있습니다.

왕궁리 5층 석탑과 금제 금강경의 발견
왕궁리 5층 석탑은 국보 제289호로 지정된 높이 8.5m의 석탑입니다. 1965년 처음 학계의 분석 대상이 된 이 석탑은 서로 다른 두 시대의 특징을 조화롭게 담고 있습니다. 돌과 돌을 이어 붙여 탑을 떠받치는 기단부 짜임새는 통일신라 석탑 양식이지만, 지붕돌이 기단부보다 넓으면서도 얇고 날렵하며 끝면이 살짝 하늘로 향하는 절묘한 처리는 백제탑 양식의 전형입니다. 이는 왕궁리 5층 석탑이 백제탑 양식을 계승한 통일신라 시대 탑임을 의미합니다.
기울어가는 석탑을 보원하기 위한 해체 작업 과정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어졌습니다. 기단부 주춧돌 중앙에는 한자의 품자 모양으로 세 개의 사리공이 뚫려 있었고, 여기서 지름 3cm의 청동 방울과 유리·옥으로 만든 구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구슬은 지름 0.3mm 정도의 미세한 크기였으며, 연꽃으로 만든 대좌 위에 조각된 청동열의 입상도 수습되었습니다. 정교한 조각 수법이 그대로 살아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이었습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1층 지붕돌에서 찾아왔습니다. 탑을 해체하자 지붕돌 윗면 한가운데서 두 개의 금동 사리함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안에는 순금으로 만든 금제사리 내압이 각각 들어 있었습니다. 동쪽 사리공에서 나온 금제사리 내함은 정교하고 화려한 문양 자체로 발굴 팀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보물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색상과 빼어난 균형미를 자랑하는 녹색 유리 사리병이 연이어 나왔고, 이는 우리나라 사리병의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서쪽 사리공에서 수습한 청동 사리함의 금제사리 내함은 비교적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뚜껑을 여는 순간 이제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귀한 유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금제 금강경입니다. 19장의 금판은 두 줄의 금띠에 묶여 있었고, 아래위로 순금 경첩을 달아 19장의 금판이 마치 하나의 책처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금판 한 장의 두께는 0.25mm에 불과했으며, 가로세로 17행의 형식에 맞춰 지혜의 완성을 설하는 금강경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순금으로 만든 금제 금강경은 세상에서 한 점뿐인 보물로, 다른 나라에는 전혀 없는 우리나라 최초이면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금제 금강경의 제작 시기와 백제 기원 분석
금제 금강경은 발견 당시 통일신라 시대 유물로 여겨졌지만, 최근 40년 만에 학계의 새로운 분석을 통해 백제 사비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경남 양산 통도사의 한정호 학예사는 금제사리 내합에 조각된 문양을 집중 연구했습니다. 높이 약 9.8cm의 반엽 크기 내항에는 수많은 작은 문양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특히 바탕면에 새겨진 물고기 알 모양의 어란문이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왕궁리 내 합의 어란문은 입자가 굵고 또렷하며 성글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반면 칠라의 사리함이나 나원리 석탑, 석가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어란문은 입자가 작고 촘촘하며 중복되어 지켜 있습니다. 이러한 문양의 차이는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는 것으로, 왕궁리 금제사리 내 합의 어란문은 6-
7세기에 제작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금제 금강경 자체의 분석도 백제 기원설을 강화합니다. 송일기 교수는 중국 둔황 유적에서 발견된 금강경 사경본과 금제 금강경을 비교 분석하여 흥미로운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822년 이전에 제작된 사경본에는 금강경 원문에 예순두 자가 빠져 있었는데, 금제 금강경에도 같은 예순두 자가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금제 금강경이 822년 이전 시기에 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한 제작 시기는 금제 금강경의 글씨체에서 드러났습니다. 금제 금강경의 글씨체는 중국 불경의 글씨체가 정형화되기 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득(得)'자는 물수변을 쓰고 있지만, 9세기 이후 제작된 당나라 불경에는 발행변의 정자체로 바뀌었습니다. 8세기에 제작된 당나라 불경에는 물수변과 발행변이 혼용되어 나타납니다. 비교 분석 결과 금제 금강경은 7세기 이전 중국 불경 글씨체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밀면을 힘차게 위로 쳐올린 아이비와 역·득·취·입자 등이 7세기 이전의 중국 불경과 같은 글씨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금제 금강경이 7세기 전반, 즉 백제 무왕 초기에 제작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재석정사에서 왕궁리로 이동한 금제 금강경의 여정
금제 금강경이 백제 때 제작된 것이라면, 왜 통일신라 시대 석탑에서 발견되었을까요? 이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는 일본 교토의 청련원에 보관된 문헌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마키다 다이리오 교수가 찾아낸 7세기 중국의 불경 기록인 '관세음응험기'에는 우리나라 기록에는 없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백제 무왕이 조성한 재석정사가 무왕 40년, 즉 639년에 벼락으로 불탔다는 기록입니다.
놀랍게도 왕궁리 석탑에서 동쪽으로 1.4km 떨어진 왕궁리 궁평마을에서 재석정사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18세기에 제작된 호남읍지를 보면 궁평마을이 속한 익산 왕궁면은 재석면으로 불렸으며, 궁평마을 뒷산은 지금도 재석 사진으로 불립니다. 이곳 발굴 조사에서 '재석사'라고 새겨진 명문 기와가 나왔고, 불탄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는 사천왕상도 발견되었습니다.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이 실제로 증명된 것입니다.
관세음응험기에는 재석사가 불타고 난 후 목탑의 심초석, 즉 주추돌을 열었더니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리 장엄구는 왕궁리 석탑의 녹색 사리병과 금제 금강경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재석 사지에는 두 동강 난 거대한 돌이 앞뒤로 놓여 있는데, 인공으로 만든 사리공 흔적이 역력합니다. 김삼룡 교수는 이 돌을 관세음응험기가 전하는 재석사 주추돌로 추정했습니다.
사리공의 넓이와 깊이를 측정한 결과 금제 금강경이 봉안되어 있던 사리공 크기와 비슷했습니다. 재석사 주추돌을 결합시키자 그 중심에 직사각형의 사리공이 생겼고, 왕궁리 석탑의 사리함 두 개를 안치시키자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이로써 관세음응험기가 전하는 재석사 주추돌의 사리 장엄구가 왕궁리 석탑의 녹색 사리병과 금제 금강경이라는 추정이 확인된 셈입니다.
백제 무왕의 지시로 만든 금제 금강경은 재석정사가 639년 불타자 지금의 왕궁리 유적지로 옮겨온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이동 시기는 알 수 없지만, 639년 이후 어느 시점에 익산 왕궁리에 금제 금강경을 봉안할 거대한 목탑이 세워지고 절집이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왕궁리 석탑 주변에서 1993년 발굴된 거대한 규모의 목탑지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한 변의 길이가 약 17m에 이르는 목탑 지는 마사토와 점질토를 한 층 한 층 시루떡처럼 쌓은 판축기법의 정교한 구조였습니다. 목탑지의 판축층에서 백제 사비 시대 연화문 수막새가 출토되어 백제 목탑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왕궁리 목탑지와 4.5km 지점에 위치한 익산 미륵사지의 목탑 지를 비교하면 백제 목탑의 특징을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목탑 높이가 60여 m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 목탑지의 한 변은 19.2m이며, 발굴 당시 47단의 정교한 판축층으로 이루어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32단의 판축층으로 만들어진 왕궁리 목탑지와 제작 기법 및 규모가 비슷합니다. 백제 목탑지와 기와의 발견으로 품자형 사리공이 뚫린 주추돌의 미스터리가 풀렸습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https://www.youtube.com/watch?v=Rd50WJ1OMS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