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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대왕암의 비밀 (수중릉 조사, 해양 능묘)

연대주척자 2026. 3. 15. 16:05

경주 앞바다 200m 지점, 거대한 암초 덩어리가 파도를 가르며 서 있습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능으로 알려진 대왕암입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은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업을 찾으라"며 대왕암을 경주 유적 중 가장 중요한 장소로 꼽았습니다. 하지만 망망대해 한가운데, 험한 암초 위에 어떻게 왕의 무덤을 만들었을까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역사스페셜 팀은 1300여 년 만에 대왕암의 물을 빼고 과학적 조사에 나섰습니다.

 

 

 

대왕암 수중릉
대왕암

 

대왕암 수중릉 조사의 전모와 과학적 검증

대왕암은 4개의 큰 암초 덩어리가 외곽을 둘러싸고 있으며, 중앙에는 바닷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십자 모양의 물길이 나 있고, 특히 동쪽과 서쪽 수로는 바닷물이 들고 빠지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삼국사기는 "7월에 문무왕이 죽자 동해에 있는 거대한 바위 위에 장사를 지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는 "감은사 동쪽 바다에 능이 있다"라고 명시합니다. 실제로 대왕암에서 서쪽으로 1.5km 지점에는 감은사 절터가 있고, 해변가에는 이견대라는 정자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신라 왕들이 이견대를 찾아와 대왕암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역사스페셜 팀은 경주 문화재 연구소와 함께 대왕암의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우선 지질학자들과 함께 대왕암의 겉모습을 살펴본 결과, 안쪽 벽면에 움푹 파인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김진섭 교수와 백인성 교수는 이것이 인위적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나침반을 이용해 절리 방향, 즉 돌이 떨어져 나간 방향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북동 방향으로 떨어져 나갔으며, 이는 경상도 지역 암석의 주 절리 방향과 동일했습니다. 육안 조사로는 인위적인 가공 흔적을 명확히 확인할 수 없었기에 물속 조사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취재팀은 동쪽 수로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물의 유입을 막고 양수기로 대왕암 내부의 바닷물을 퍼냈습니다. 1시간여의 작업 끝에 1300여 년간 물속에 가려져 있던 대왕암의 내부가 드러났습니다. 4개의 암초 덩어리로 보였던 주변 암초는 실상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고, 중앙의 거대한 돌은 약 20톤 무게로 정확히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물이 빠진 내부를 살펴본 결과, 곳곳에 인위적으로 깎아낸 흔적이 명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자연적인 풍화와 인공적인 가공은 육안으로도 구분이 가능했으며, 대왕암 안쪽을 동일하게 다듬기 위해 튀어나온 부분만 깎아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중앙의 거대한 돌 아래를 조사한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레이더 탐사와 전자 탐사를 통해 돌 아래의 구조를 분석한 결과, 단단한 암석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부장품이나 유골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지하 암반에는 수직으로 심하게 갈라진 절리가 발달되어 있어, 이러한 구조에서는 유골을 안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일반적인 능의 개념, 즉 시신이나 유골을 지하에 묻고 봉분을 만드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구조였던 것입니다.

능지탑 화장터와 문무왕 유골의 행방

대왕암에서 유골이 발견되지 않자, 취재팀은 경주 시내의 낭산으로 향했습니다. 신라시대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졌던 낭산에는 능지탑이라는 특이한 유적이 있습니다. 1975년 황수영 박사를 비롯한 신라 유적 조사단에 의해 복원된 능지탑은 일반적인 탑과 모양새가 다르며, 절터의 흔적도 없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발굴 당시 과장터의 흔적들이 발견되어 이곳이 화장터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능지탑이란 이름 자체가 "능이 있는 탑"을 의미하는데, 문무왕과의 연관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삼국사기는 문무왕이 자신이 죽고 열흘 뒤에 화장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곳이 "고문비장", 즉 "문의 밖 들"이었다고 명시합니다. 능지탑의 위치가 바로 이 고문비장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더욱 결정적인 단서는 1960년 경주 시내 한 가정집 정원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입니다. 해동금석과에는 "선덕왕릉 아래에 문무왕릉비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덕왕릉 자리는 현재 사천왕사터로 확인되며, 이곳에는 2기의 귀부가 동쪽과 서쪽에 각각 자리하고 있습니다.
홍사준 관장의 조사에 따르면, 발견된 문무왕릉비는 사천왕사 서쪽 귀부에 꽂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귀부의 비석 구멍이 독특하게 2단으로 되어 있어, 문무왕릉비의 받침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22년 일본인의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이 서쪽 귀부는 원래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기차 선로 공사를 하면서 남쪽으로 돌려놓았다고 합니다. 즉, 원래 서쪽 귀부는 북쪽의 능지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무왕의 비석이 능지탑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은, 능지탑에서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문무왕릉비에는 "분골경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분골"은 뼈를 가루로 만들었다는 의미이며, "경진"은 고래가 사는 바다를 뜻합니다. 비문의 앞부분에는 "소장", 즉 화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뒷부분에는 "장제적시", 즉 장작을 쌓아 장례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결국 문무왕은 능지탑에서 화장되었고, 그 유골 가루는 동해바다, 즉 대왕암에 뿌려진 것입니다. 이는 문무왕이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대왕암은 실제 유골을 안치한 물리적 무덤이 아니라, 문무왕의 유언과 호국 의지를 담은 상징적 해양 능묘였던 것입니다.

대왕암 해양 능묘의 상징적 의미와 역사적 평가

대왕암이 전통적인 의미의 능이 아니라는 사실은, 오히려 이 유적의 독창성과 상징성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중앙의 거대한 돌이 정확히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고, 안쪽 벽면을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다는 사실은 대왕암이 계획적으로 조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돌 아래에 유골은 없었지만, 이곳은 문무왕의 유골 가루가 뿌려진 신성한 장소였습니다. 십자 모양의 물길은 바닷물이 끊임없이 순환하도록 설계되었고, 이는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어 영원히 바다를 지킨다는 상징을 구현한 것입니다.
감은사, 이견대, 능지탑, 문무왕릉비, 대왕암은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위대한 군주였으나, 생전에 감은사 건립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신문왕이 감은사를 완공하고, 능지탑에서 아버지를 화장한 뒤 유골을 대왕암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사천왕사에 문무왕릉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역대 신라 왕들은 이견대에 올라 대왕암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고, 문무왕의 호국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유적들은 신라인들의 정교한 공간 설계와 깊은 사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비평에서 언급했듯이, 대왕암을 물리적 무덤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실제 조사 결과 유골이나 부장품이 없었다는 사실은, '장사'와 '능'의 의미를 당시 장례 관념 속에서 재해석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신라인들은 이를 대왕암이라는 독창적인 해양 능묘로 구현했습니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례 문화이자, 문무왕의 정치적 상징을 극대화한 기념물입니다. 단순히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을 넘어, 국가의 안위와 왕의 영생을 기원하는 신성한 제의 공간으로 기능했던 것입니다.
문무왕 대왕암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신라의 호국 정신과 독창적 장례 문화가 응축된 역사 유적입니다. 능지탑에서의 화장, 유골의 해양 안치, 감은사와 이견대의 공간적 배치는 모두 문무왕의 유언을 실현하기 위한 정교한 설계였습니다. 비록 중앙의 돌 아래에서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는 대왕암이 물리적 무덤이 아닌 상징적 해양 능묘임을 더욱 명확히 보여줍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의 말처럼, 경주를 찾는다면 구경거리가 아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을 대왕암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역사스페셜 - 문무왕 대왕암의 비밀: https://www.youtube.com/watch?v=8M7hXP9CEcg